제6장. 미슐랭. 리더들의 만남
82차원은 오래된 전장이었다. 수많은 전투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그곳에서, 1위 연맹인 LOK 멤버들의 마음속에는 한 리더가 있었다.
그 이름은 미슐랭. 전장을 설계하고 사람을 움직이며, 누구보다 강하지만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지 않는 LOK의 유일한 지도자였다.
그는 차원의 가장 앞자리에 섰지만, 결코 혼자 움직이지 않았다.
“정각 6시, 폭격 예상. 탐색조는 북쪽 산개. 001에게 병력 지원은 필요 없습니다. 후방 수비는 라인 따라 고정하고, 위치만 지키세요.”
“한더님, 로마 쪽 점령 맡아 주세요. 탄약님, 자원 줄어드는 거 체크하시고 보급 챙겨 주세요.”
“이건 혼자 못 막습니다. 다 같이 움직입시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고, 그가 던지는 지시는 오해의 여지 없이 명확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전략은 모두의 몸을 하나로 움직이게 했다.
* * *
차원전이 예고되던 날, 미슐랭은 상대 차원에 대한 전력 보고서를 살펴보고 있었다.
93차원의 SSV 리더 문데. 94차원의 PaF 리더 루안.
전투력만으로 보면 82차원에 못 미치는 새롭게 생성된, 역사가 짧은 차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연합한다면 어떨까… 방심은 할 수 없었다.
미슐랭은 언제나 모든 가능성을 대비하는 자였고, 그날도 승리를 위한 작전을 구상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미슐랭님. 93차원의 문데라고 합니다. 자리를 마련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94차원과 이미 대화를 나눴고, 저희는 저희보다 전력이 강한 82차원에게 승리를 양보하려 합니다.”
문데의 정중한 요청이었다. 미슐랭은 눈을 가늘게 뜨고 메시지를 읽었다.
항복 요청? 쓸데없이 동료들의 피를 흘리는 것은 이쪽에서도 사양이니, 꽤나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얘기를 들어보죠.”
그렇게 셋은 작은 방에 마주 앉았다.
계략과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을 품고 마련한 자리였다. 미슐랭은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루안이 얼어붙은 분위기를 환기하듯 몇 번 헛기침을 했고, 문데는 품에서 조심스레 술병과 작은 술잔을 꺼냈다.
“93차원 명물입니다. 대화 자리엔 술이 빠지면 섭섭하잖아요.”
미슐랭이 잔을 들어 빛을 확인하더니, 코웃음을 쳤다.
“이 술, 여기서도 팔아.”
“와하하하하.”
셋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은 그렇게 깨졌다.
루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나는 먼저 문데와 대화했고, 94차원도 그의 뜻에 동의했네.”
그리고는 문데에게 한마디 던졌다.
“근데 넌, 날 보자마자 질 준비하라고 선전포고하더라. 그 용기는 어디서 난 거야?”
문데는 뒷머리를 긁으며 답했다.
“형님에게는 좀 강렬하게 다가가야 제 얘기를 들어주실 것 같아서요.”
“그게 82차원에게 질 준비를 하라는 거였다니…”
“하하하하.”
두 차원의 리더로부터 곧 열릴 차원전의 승리를 보장받았다.
알게 모르게 마음속을 짓누르고 있던 미슐랭의 부담도, 조금씩 가벼워져갔다.
세 사람의 대화는 밤이 새도록 이어졌다.
“일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어. 내가 리더만 아니었어도…”
“저는 임시 리더라 다행입니다.”
“임시? 93차원은 너 같은 녀석이 또 있어?”
“내 맘도 모르고 속 썩이는 녀석들이 가득해.”
“차원의 1위는 언제나 외로운 법이죠.”
“저도 이번에 어쩌다 보니 1위가 되었는데, 제 자린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같은 차원에서 만났다면 어땠을까요?”
“많이 다퉜을까?”
“글쎄. 나는 좀 다르게 봐.”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술잔이 오가며, 전술 대신 마음을 나눴다.
서로의 차원이 다르기에, 그만큼 더 쉽게 터놓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루안은 잔을 들고 말했다.
“언젠가 둘 모두 내 아래에서 모이는 걸로 하자.”
루안이 말하자 문데가 웃으며 따라받았다.
“알겠습니다.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저희는 인원이 좀 많은데, 걱정되네요?”
“걱정은 보험회사가 하라고 하고.”
셋의 술잔이 한 번 더 부딪쳤다. 짧지 않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돌아가는 길, 미슐랭은 문데에게 조용히 말했다.
“문데, 나중에 차원의 바깥에서도 대화가 닿을 수 있게 연결선을 하나 만들어줘.”
문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안 형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좀 바쁘지만 좋아. 이렇게 말이 통하는 셋, 찾기 힘든 조합이지.”
루안의 승낙에 문데가 웃으며 한마디 더 던졌다.
“도원결의인가요, 우리?”
셋은 동시에 웃었다. 협의는 계약서도 없이 맺어졌지만, 그것은 정확히 지켜졌다.
차원전 이후, 세 리더는 다시 각자의 차원으로, 각자의 전장으로 돌아갔지만,
언제든 손을 뻗을 수 있는 거리에 함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