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5 〈빈 자리〉
93차원 시절의 나는 겁쟁이였다.
잠들기 전이면 가장 먼저 보호막 시간을 확인했다.
혹시라도 새벽에 꺼지는 건 아닌지 몇 번이고 계산했고, 알람까지 맞춰 놓고 잠들었다.
보호막이 꺼진 사이 기지가 털리는 일은 너무 흔했다.
특히 ASY의 터키 사람들은 언제나 새벽을 노렸다.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강해지는 방법도.
전쟁도.
그저 불타는 기지에 붙어서 불을 끄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연맹 전황창에 내 좌표가 뜨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빨간 행군선 하나만 보여도 식은땀이 났다.
자고 일어나면 기지는 잿더미였다.
복구를 마치고 리포트를 열어 보면.
거기에는 늘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Skycan.
처음에는 무서웠다.
다음에는 억울했다.
그다음에는 화가 났다.
"왜 맨날 나만..."
혼잣말을 하며 복구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렇게 맞고만 살지는 않겠다고.
남들보다 강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더 이상 맞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TOV를 떠나 SSV로 옮겼다.
1연맹은 분위기부터 달랐다.
강한 사람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강해지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콘트라베이스는 내가 가장 많이 따라다닌 친구였다.
월드보스 순위표 맨 위에는 언제나 그의 이름이 있었다.
"강해지고 싶으면 월드보스를 잡아."
그 말을 들은 뒤부터 나는 늘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왜 이 탱크를 써?"
"부대장은 왜 얘야?"
"여긴 왜 이렇게 배치해?"
질문은 거의 내가 다 했다.
콘트는 귀찮아하면서도 결국 하나씩 다 알려줬다.
탱크와 병종.
부대장 조합.
공격 위치.
이동 타이밍.
그렇게 하나씩 배우다 보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난 기지의 불만 끄던 내가 어느새 월드보스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월드보스 순위표에 내 이름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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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콘트가 웃으며 말했다.
"내일 여친이랑 캠핑 간다. ㅋㅋ"
그는 접속을 종료했다.
그냥 며칠 쉬는 줄 알았다.
그저 여행이 길어지는 줄 알았다.
그 뒤로도 월드보스는 여덟 시간마다 나타났다.
하지만 콘트의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월드보스가 나올 때면 또 아무렇지 않게 접속해서,
"오늘도 1등 먹어야지. ㅋㅋ"
하며 웃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가 언제나 서던 자리에 섰다.
"비켜."
"앞으로 여긴 내 자리다."
충동적인 선언이었다.
정말 그 자리가 완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순위표 가장 위에는 언제나 내 이름이 적혔다.
사람들은 이제 그 자리를 내 자리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그 자리엔 언제나 콘트가 있었다.
월드보스가 나타나면,
늘 콘트처럼 병종을 골랐고,
콘트처럼 부대장을 세웠고,
콘트처럼 공격 위치를 잡았다.
월드보스를 상대할때면
"그건 아니지."
"거기 말고 여기."
... 웃으며 알려주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잠시 지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가 돌아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그 자리를 내어줄 수 있도록.